1998년 나는 향동동에서 태권도 사범생활을 했다.
향동동은 고양시에 속하면서도 전화는 서울 전화를 사용하는 동네였다.
한옥과 양옥이 반반 정도인 이곳은 농사를 짓는 사람들도 있었고, 비닐하우스에서 뭔가를 키우는 사람들도 있었던 이곳은 고양시가 발전을 할 때에도 군사지역이나 그린벨트지역으로 묶여 있었던 곳으로 기억된다.
동네에서 2층짜리 건물이 가장 높은 건물일 정도로 낙후된 동네였다.
오로지 태권도의 품새와 겨루기만 배웠던 아이들에게 내가 가면서 낙법, 덤블링, 봉술, 쌍절봉 등을 가르쳐 주자 나는 그야말로 TV속에서만 보았던 무술을 직접 가르치는 대단한 사범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어느 체육관에서나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운동 신경이 발달한 아이들이 몇몇 있었는데, 그 아이들을 중심으로 시범단을 만들어 다른 체육관에서 시범을 보여주기도 했다.
어느날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었다.
평소 일찍 오던 아이 하나가 학원에서 늦게 끝났다면서 마지막 수련 시간에 왔다.
한시간의 수련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시간인데 그 아이는 내 눈치를 살피면서 체육관에 남아 있는 것이었다.
비가 많이 내리는건 아니었지만 바깥은 캄캄했다.
이 동네는 가로등도 그리 많지 않다.
구멍가게 앞이나 큰 길가에는 뜨문뜨문 있지만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에는 가로등이 없었다.
우산을 가지고 온걸로 봐서 비가 오는게 문제인것 같지는 않았다.
"왜? 집에 가기가 무섭니?"
"....네."
"잠깐 기다려라. 내가 이것만 끝내고 데려다 줄게."
나는 하던 일을 마치고 체육관을 나와 아이와 우산을 같이 쓰고 걸었다.
동네가 크지 않아서 아이들의 집은 거의 알고 있었다.
체육관 언덕을 내려와 구멍가게를 지나 좁은 골목을 지나면 아이의 집이 있었다.
좁은 골목에는 부엌이 같이 있는 단칸방들이 네 칸이 있는 스레트집이 있었는데 그곳은 가로등이 없었다.
아마 이곳을 지나는게 무서워서 그랬나 싶은 생각을 하면서 좁은 골목에 들어섰다.
네 칸 중에서 두번째 칸의 집 앞에 누군가 모자를 눌러 쓰고 고개를 약간 숙인채 벽에 기대어 서있었다.
차양도 좁아서 비를 다 맞을텐데 왜 바깥에 서 있을까 생각하면서 아이에게 물었다.
"저 아저씨 아는 아저씨니?"
아이가 스레트집 쪽을 보면서 나에게 되묻는다.
"어떤 아저씨요?"
순간 머리가 쭈삣했다.
저게 사람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아이가 놀라지 않도록 조용히 말했다.
"응, 아니야, 내가 잘못 봤구나."
"어머니 커피 한잔 주세요."
아이와 함께 들어 가면서 학부모에게 한마디 했다.
커피를 마시면서 저 길을 어떻게 다시 가야 하는지 고민이 되었다.
그러나 학부모 집에서 잠을 잘 수는 없어서 커피를 마신후 나와야 했다.
나는 대문을 열고 우산도 쓰지 않은채 골목을 뛰기 시작했다.
뛰면서도 궁금증이 생겨서 남자가 기대섰던 벽을 힐끔 쳐다보았는데 아무도 없었다.
골목을 돌아 구멍가게를 지나서야 뛰는걸 중단했다.
그렇게 몇일이 지난 어느날 그 골목이 많은 불빛들로 찬란했다.
무슨일인가 싶어서 다가갔더니 경찰차, 119구급차, 앰블란스 등의 차들이 경광등을 켜놓고 서있었고, 남자가 기대섰던 방에서 어떤 사람을 들것으로 실어 나르고 있었다.
119구조대 사람들이 내 옆을 지나가면서 한마디 한다.
"약 먹고 자살했나봐, 죽은지 열흘은 되는것 같아."
"동남아사람 같은데 혼자서 힘들었나보네."
이 말을 듣고 가만히 짚어보니 벽에 기대어 선 남자를 본 것도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
혹시 아무런 연고도 없는 타국에 와서 자살한것을 나에게 처리해달라는 의미로 나타났던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