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석 이야기

어머니 요양원 가시던 날 1

전통활법 2022. 10. 13. 14:49

참 많이 울었다.

멈추려해도 멈춰지지 않는...

 

어머니는 치매였는데 날이 갈수록 심해지셨어.

처음엔 동네 마트에 가서는 매일 똑같은 메뉴들을 사오시더라구.

똑같은 메뉴들은 냉장고에 쌓이기 시작했고, 때로는 마트에 가서 반품처리를 하기도 했지.

수돗물 틀어놓고 잊어버리는건 그나마 다행이었어.

가스불을 켜놓고 잊어버리는건 아주 위험했지.

냄비를 태워서 버린게 하나 둘이 아니야.

우리는 어머니를 나무라기만 했어.

그게 치매인줄 몰랐던거지..

 

우리 어머니는 안(安)씨 성에 소띠야. 

1925년생 이시지.

북쪽에서 태어나셔서 어렸을때는 일본의 통치하에 고생하셨고, 1.4후퇴때 피난 내려오셔서는 갖은 고생을 다 하신 분이야.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다고 하네.

위로 딸 둘, 아래로 아들 다섯, 그 중에 나는 막내로 태어났어.

남편이 없는 상태에서 7남매를 키우셨으니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셨겠어.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항상 뭔가를 하시는 모습이었어.

헌 책을 구입해서는 봉지를 만들어 팔았고,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청소 일도 하셨고, 리어카에 미제 사탕이며 껌이며 쵸컬릿 등등을 구비해서는 판매도 하셨는데 당시에 그건 불법이었나봐.

사흘에 한 번 씩 구청에서 단속을 했는데 어머니는 시력이 나빠서 단속원이 와도 물건을 사러 온 사람인줄 알았다고 하셨어.

돈이 없으니까 안경은 꿈도 못 꾸었지.

내 기억에도 우리집은 항상 아침을 먹으면 저녁을 고민해야 했어.

점심이란게 있었는지도 몰랐지.

아뭏튼 내가 어찌 어머니의 고생스런 시절을 다 알겠어?

엄청난 고생을 하신 분이라는것만 아는거지.

아직 생존해 있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힘든 시절을 보낸 세대라고 생각해.

 

자식들이 커가면서 자식들도 일을 하기 시작했어.

큰누나는 자기 한 입이라도 줄여볼까 하고 일찍 결혼을 하셨다는군.

내 기억에 큰누나의 결혼 모습은 없어.

내가 아주 어릴때 결혼하셨나봐.

작은누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바로 취직해서 살림에 보탰고, 큰형은 장남이라는 이유로 고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일을 해야 했어.

공고를 입학하면서 교장선생님을 찾아가서 사정했다고 들었어.

학비는 밀리지 않고 드릴테니까 졸업장만 받게 해달라고..

누가 시킨것도 아닌데 스스로 결정했다고 하네.

장남이란게 다른 사람들하고는 생각이 다른가봐.

 

언젠가 어머니가 <가요무대>를 보면서 김정구선생님의 <눈물젖은 두만강>이라는 노래를 따라 부르셨어.

노래가 끝나고 어머니가 말씀하셨자.

"저 김정구씨가 엄마의 오빠랑 둘도 없는 친구였어."

나는 깜짝 놀랐지.

"정말요?"

"그래, 옛날에 오빠랑 김정구씨랑 공놀이도 하고 그러던 모습이 생각나네. 나랑도 잘 알고 지냈었는데.."

어머니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말씀하셨어.

"옛날에 원산에서 콩클대회가 있었는데, 거기서 내가 3등을 하고 김정구씨가 1등을 했었다."

"그럼 엄마도 가수하지 그랬어요?"

"그 시절엔 딴따라라고 해서 저런 직업은 광대들이나 하는걸로 인식이 되어 있었지. 특히 여자가 가수를 한다는건 상상도 못했던 시절이였어. 아버지가 결사 반대를 하셨거든."

큰형이 한마디 했어.

"그럼 지금이라도 한 번 만나 보세요. 방송국으로 연락하면 만날수 있을텐데요?"

"아니야, 내가 이렇게 사는데 만나봐야 서로 마음만 아프지. 김정구씨도 저 나이에 방송에 나오는걸 보면 그리 잘 사는것 같지도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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