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법 이야기 19
몇일전에 손녀딸과 함께 오셨던 할머니가 또 오셨다.
"안녕하세요?"
"응, 그래, 운동은 몇시에 끝나?"
"운동은 7시쯤 끝납니다."
"그럼 이것저것 정리하면 7시 반은 되겠네? 운동 끝나고 우리집에 좀 와봐."
"왜요?"
"글쎄, 할 말이 있어. 1207호야. 알았지?"
무슨일로 집에까지 오라는건지는 모르겠지만 할머니의 말씀이니 안갈수도 없고 해서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올라갔다.
초인종을 누르니 기다렸다는듯 할머니가 나와서 문을 열어 주신다.
거실에는 손녀딸이 쇼파에 앉아 있다.
할머니는 나에게 쇼파에 앉으라고 말을 한 뒤 방으로 들어가서는 나오지를 않는다.
쇼파에 손녀딸과 둘이 앉아 있으려니 서먹서먹하고 뭘해야 할지 모르겠다.
쇼파 앞의 탁자 위에 사기로 만들어진 담배상자가 놓여 있다.
손녀딸이 담배 상자를 열어 나에게 보여 주는데, 여러가지 담배들이 낱개로 가득 담겨져 있었다.
"한 대 피워 보실래요?"
"아뇨, 담배 안핍니다."
"그래도 한 대 피워 보세요."
"할머니도 계신데 무슨.."
"이건 매운맛이 나는 담배구요, 이건 엄청 독한 담배에요."
손녀딸이 낱개의 담배를 가르키며 나에게 설명을 한다.
담배도 여러가지 맛이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 담배맛을 안다는건 모두 피워 봤다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담배를 안피우자 손녀딸이 영화를 한편 보자면서 TV를 켜고는 비디오 테잎을 끼운다.
"슈퍼맨 영화에요."
얘들도 아니고 무슨 슈퍼맨 영화를 보나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한국어 자막도 없는 영어로 된 영화였다.
슈퍼맨이라는 영화도 흥미 없는데 거기에 말도 못알아 들으니 재미가 없었다.
그런 나를 손녀딸이 눈치 챘는지 한마디 한다.
"지금 슈퍼맨이 뭐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악당이 뭐라고 하네요."
손녀딸은 영화에서 나오는 영어들을 모두 나에게 통역을 해주었다.
기분이 상했다.
사람을 불러놓고 뭐하자는건가..
여자가 담배도 피우는것 같고, 영어를 통역하면서 자존심이나 상하게 하고...
집에 가봐야 겠다고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녀딸은 내가 왜 일어나는지 당황하는 모습이었지만 나는 여자를 만나는것보다는 지금 공부해야 할 것 들이 너무나 많았고, 또 여자보다는 운동이 너무 좋았다.
또한 할머니가 말하는 장가갈 나이도 안됐고..
약국에 도착하니 약사님께서 정리를 하고 계신다.
"퇴근하시는건가요?"
"어? 오늘은 좀 늦었네?"
"네, 체육관 동네에 사는 할머니가 자꾸 손녀딸을 만나게 해서요."
"그럼 좋은거 아냐?"
"저는 아직 여자에 관심 없어요."
"왜그래? 남자가 여자에게 관심이 없다는건 좋은게 아닌데?"
"저는 아직 공부해야 할것들이 너무 많구요, 또 운동하는게 너무 좋아요. 예전에 우리 운동 선배가 한 말도 있구요."
"뭐라고 했는데?"
"무술하는 남자가 여자를 일찍 알면 수련이 안된대요. 성공도 할수 없구요."
"허허.. 그건 아닌것 같은데.. 너무 빠지면 안되겠지만.."
"아뭏든 퇴근 준비 하시는데 죄송해요, 그만 가볼게요."
"아냐 아냐~, 잠깐 앉았다가 가. 나도 퇴근해봐야 별로 할일도 없어."
약사님은 나에게 드링크를 하나 주시면서 마시라고 한다.
"약사님 혹시 약주는 안하세요?"
"술? 마시긴 하는데 좋아하는 편은 아니야. 왜? 술 한잔 할래?"
"간단하게 한잔 하시죠? 제가 한잔 사드릴게요."
"하하, 술값이야 누가 내면 어때? 그래, 나가자구~."
우리는 포장마차로 이동하여 소주와 꼼장어를 주문했다.
"약사님은 좋으시겠어요."
"뭐가?"
"인체에 대해서 잘 아시니까 아픈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아시고, 약사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병을 고칠수 있잖아요?"
"그렇게 보이나?"
"네."
"아니야, 인체에 대해선 나도 아직 모르는게 많고, 병이라고 하는건 약이 개발되면 또 다른 새로운 병이 나타나는 것이지."
"약사님이 인체에 대해서 모르는게 많다구요?"
"그래, 양약이란 과학적으로 증명된것에 대해서만 만들어지거든, 근데 과학이란건 언제든지 변할수 있는거야. 1600년대에 지구가 돌고 있다고 말을 한다면 미친사람 소리를 들었을거야, 그러나 현대에 와서 지구는 가만히 있고 하늘이 도는것이라고 하면 무식하다는 말을 듣겠지? 지금 우리나라, 아니 전 세계적으로 입증된 과학들이 과연 진실일까? 앞으로 몇십년이 지나면 바뀌지 않을까?"
"그렇다고 안 믿을수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문제인거야, 지금 좋다고 하는 약들이 몇십년 후에 오히려 독약으로 밝혀진다면 어쩌겠어?"
"에이~ 설마 그럴리가 있겠어요? 효능이 더 좋은 약이 개발된다면 모를까.."
"물론 더 좋은 약들도 개발이 되겠지. 그런 이야기는 다음에 하고, 오늘은 일반적인 이야기를 하자구."
약사님은 잔을 들어 나에게 내민다.
나도 술잔을 들어 약사님과 가볍게 부딛치며 한잔 마셨다.
"지금 몇살이라고 했어?"
"스물한살이요, 만으로 스무살이죠."
"내가 스물 아홉이니까 여덟살 차이나네? 그럼 그냥 형님이라고 불러."
"알겠습니다."
"스물 하나면 한 오년 정도 남았는데, 여자를 너무 멀리하면 안되지."
"뭐가 오년 남아요?"
"요즘 결혼 적령기가 25~26세 잖아? 남자가 한사람만 사귀어 보다가 결혼하는건 별로 좋지 않아. 여러사람을 만나보고 좋은 사람하고 결혼 해야지.."
"여자에 관심이 없다니까요? 그리고 예전에 한 스님께서 저보고 혼자 살 팔자라고도 했구요."
"그런거 너무 믿지마."
"그 스님께서 저희 어머니 장독대에서 떨어지는 날짜까지 맞췄다니까요?"
"허허, 대단한 분이네.. 그럼 아우는 인생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나?"
"어느정도는요... 그런걸 보고 나면 안믿을수가 있겠어요?"
"인생이 정해져 있다면 너무 재미가 없을것 같아.. 그걸 아는 사람들은 다치지도 않고, 행복하게 살겠네? 미래를 아니까 복권도 당첨되고, 돈도 많이 벌것이고.. 별다른 노력도 필요 없을것이고.."
"글쎄요?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아뭏든 나의 미래를 안다는게 썩 좋은일은 아닐것 같아. 내가 내일 죽는다는걸 알고 있다면 오늘 어떤 마음이겠어?"
"재미 없겠죠."
"그러니까 미래는 모르는게 정답이야, 뭔가 개척해 나갈려고 노력도 하는것이고.."
"미래의 나쁜일을 미리 안다면 피해갈 수도 있지 않겠어요? 가령 사고가 나는걸 미리 안다면 사고를 피할수도 있겠죠."
"그럴수도 있겠지, 하지만 사고를 피할때까지는 계속 불안한 마음이 있지 않을까? 이런 불안함 때문에 다른일을 못할수도 있을것이고.."
"불안한 마음도 있겠지만 호기심도 있지 않겠어요? 나에게 무슨일이 생길까..하는?"
"사고가 있는지 없는지는 아는데, 어떤 사고일지는 모른다는건가?"
"글쎄요.. 그건 아는건지 모르는건지 모르겠네요."
"궁금하면 그쪽 공부도 해보면 되겠지. 그래서 죽을때까지 독신으로 살거라고?"
"설마 독신으로 끝나겠어요? 언젠가는 결혼도 하겠지요."
"그럼 아우도 100% 믿는건 아니군?"
"100%는 아니죠. 그냥 스님의 말씀대로 나중에 일어나는 일들이 신기하다는 거죠."
"세상엔 신기한 것들은 많이 있겠지. 참, 그리고 나는 얼마 있다가 약국 문 닫을거야."
"왜요?"
"나는 사실 약사의 길이 재미없어. 나의 꿈을 위해서 돈을 벌려고 했던 일인데 생각만큼 돈을 벌지도 못하고.."
"꿈이 뭔데요?"
"시골로 내려가서 목장을 하는게 꿈이야. 넓은 목초지에서 가축들을 키우는거지. 우리에 가둬 놓는게 아니고 자연스럽게 뛰어 다니도록 기르는거지."
"그럴려면 굉장히 넓은 땅이 있어야 겠네요?"
"그렇지, 지금 알아보고 있기는 하는데.. "
"어디서 하시려구요?"
"내고향이 충청도니까 충청도 쪽을 알아보고 있어. 그쪽에서 어디든 자리가 되는곳을 찾고 있는 중이지."
"그럼 자리를 찾으면 바로 내려가실거예요?"
"그럴 생각이야."
"그럼 제가 궁금한건 누구한테 물어보나요?"
"하하, 그렇다고 당장 문닫는건 아니고, 또 아우가 충청도로 놀러와도 좋고.."
약사님의 말에 갑자기 우울해졌다.
그동안 여러가지 물어보면서 정도 들고 도움도 많이 받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