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여성시대 사연소개

전통활법 2016. 3. 22. 07:35

피부미용사 시험에 합격하고 학원을 찾아갔던 날이 생각난다.


피부미용사는 상대의 몸을 만질 수 있는 유일한 국가고시 자격증이다.

마사지 같은 것은 국가고시가 아닌 민간자격이고 우리나라에서 불법으로 취급 받지만 피부미용사 자격을 취득하면 일부 오일마사지 같은 것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언젠가 피부미용사 시험을 보기 위하여 학원을 검색했었다.

여러 학원들 중 눈에 들어온 곳은 남성전문 학원이었다.

바로 접수를 하고 이론과 실기에 대한 책을 받았다.

평소 인체에 관심이 있었다고 하니 필기는 한번에 붙겠네요, 라고 말하는 원장과 동료들의 말에 부담이 컸다.

사실 나는 평소에 스킨 로션도 바르지 않는 습관이어서 마스카라가 뭔지 아이쉐도우가 뭔지도 몰랐었기 때문에 부담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400페이지가 훨씬 넘는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세번을 읽었다.

그러나 머리 속에 남는 내용은 별로 없었다.

건성피부, 지성피부, 정상피부들을 외우는 것도 어려웠지만, 피부를 검사하는 갈바닉기구라던지 고주파 기구라던지 이런 것들은 무척 생소했다.

거기에 피부미용에 관한 법률은 무척이나 헷갈렸다.

어떨때는 영업정지, 어떤때는 벌금, 또 어떤때는 징역까지..

비슷비슷한데 형벌이 다르니 외우기 힘들었다.


필기시험을 보던 날, 시험은 60문항에 60분의 시간이 주어졌다.

36문제 이상 맞추면 합격.

컴퓨터 앞에 앉아 시험을 보는데, 문제를 다 풀고 확인 버튼을 클릭하는 순간 점수와 합격여부가 바로 화면에 뜬다.

30분 정도가 지나자 한두명씩 일어서 나가기 시작한다.

한사람이 일어나기에 힐끗 봤더니 <80점/합격>이라는 화면이 뜬다.

아.. 얼마나 좋을까..

또 한사람이 일어나기에 봤더니 <58점/불합격>이란다.

좀 더 생각좀 하지..

나는 답을 다 쓰고 나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보고 또 다시봤다.

5분 남았습니다. 라는 멘트를 들었을 때, 두 눈을 감고 기도를 했다.

확인버튼을 누를까 어쩔까를 고민하다가 눌렀다.

<69점/합격>이라는 화면이 뜬다.

아.. 감사합니다.


필기를 합격한 후 실기를 응시할 수 있는 기간은 2년이란다.

눈과 입술 클렌징, 얼굴클렌징, 매뉴얼테크닉은 순서를 외우기가 힘들었다.

피부에 따라 다른 딥클렌징, 눈썹관리, 팩, 다리제모, 팔다리 오일마사지, 림프마사지 등을 배우는데 왜 그렇게 헷갈리던지..

어떤때는 눈을 먼저 가리고 팩을 바르고, 어떤때는 팩을 바르고나서 눈을 가리고, 또 어떤때는 눈을 아예 가리지도 않고,,

냉습포를 쓸 때와 온습포를 쓸 때도 헷갈렸다.

피부미용 실기시험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다 보기 때문에 어느 한가지라도 모르면 안된다.

처음 웨건정리를 하는 방법부터 정리하는 것까지 모두가 시험범위이다.


이렇게 한가지씩 배워가던중 교통사고가 났다.

신호등 앞에 신호대기로 서 있는데, 승용차가 와서 나의 승합차를 받았다.

휴대폰을 한건지 잠깐 졸음 운전을 했는지 모르겠다.

 

연신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이는 상대편을 보고는 웬만하면 그냥 가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승합차의 뒷문이 찌그러져 천상 공업사를 가야 할 상황이었다.

상대방은 보험처리로 나의 차를 고쳐주었고 그걸로 끝냈다.


교통사고 후유증은 몇일 안가서 나타났다.

허리가 아프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실기 과정중에서 팔과 다리관리를 서서 해야 하는 작업이 허리때문에 쉽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팔관리 10분, 다리관리 15분의 작업이 필요한데, 선 자세로 2~3분만 지나면 허리가 아파서 더이상 작업하기가 곤란했다.

이때부터 학원을 소홀히 하게 되었고, 원장과의 갈등도 시작되었다.

원장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작업하는 나에게 지적을 하기 시작했고, 허리가 아프다는 말이 통하지 않게 되자 지적은 잔소리로 변해 나를 힘들게 했다.

하지만 원장에게 화를 낼 수도 없는 상황이라서 스스로를 <불량학생>이라 칭하고는 학원을 빼먹는 날이 많아졌다.

원장이 뭐라고 할때면 `앞으로 2년은 남았는데요, 그 전에 붙으면 되죠.`라고 말하고, 오전 오후 수업을 모두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나는 오전수업만 하고는 `불량학생 갑니다~` 라고 말하고는 학원을 나와버렸다.

열심히 하지도 않고, 대충대충하는 나에게 원장은 잔소리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당연히 떨어질 사람으로 생각하는듯 했다.


나는 경험삼아 한번 보겠다고 말하고 원장에게 실기시험 접수를 부탁했다.

원장은 어쩔수없이 해준다는듯 접수를 해주었다.

시험 전날은 학원에 가지 않고 집에서 준비를 했다.

1과제 세팅과 2과제 세팅을 준비해서 각각의 가방에 담았다.

젖은 솜은 혹시 모자를지 몰라서 한통을 더 준비했다.


시험장엔 오전 7시까지 가서 다른 학원생들과 모델들, 원장과 만나기로 했다.

다행히도 시험날의 일진은 사주상 나에게 도움이 되는 좋은 날이었다.

원장은 각각의 수험생들의 준비물을 체크해주었다.

나의 준비물을 보는 순간 왜 지퍼팩을 안가져 오고 비닐봉지를 가져 왔느냐고 묻는다.

 

나는 지퍼팩을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해 들은 기억이 없다.

반문을 하려다가 학원에 열심히 나가지도 않았기에 그냥 참았다.

지하 매점에 가서 사오겠다고 하니, 그럴필요 없다며 그냥 비닐봉지로 하라고 해서 이것에 대한 감점은 없느냐고 했더니 말을 안한다.

떨어질 사람이 준비는 뭐하려고 하느냐 라는 뜻으로 생각되어 순간 화가 났지만 또 참았다.

같이 시험보는 동료가 남는게 있다면서 비닐지퍼팩 3장을 준다.

원래 5장이 필요한데, 그냥 3장으로 하기로 생각하고 고맙다고 말했다.


내가 다닌 학원에서 같은날 시험보는 학생은 7명이었다.

그중에서 내가 제일 나이가 많다.

제일 나이도 많은 사람이 학원도 열심히 다니지 않았으면서 원장에게 화를 낸다는 것도 우습고 해서 원장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모른척 했다.

한 학생이 늦게 도착했는데, 실내화를 안가져 왔다고 원장에게 말한다.

원장은 빨리 지하 매점에 가서 실내화를 사가지고 오라고 한다.

가는 학생에게 지퍼팩을 부탁하려 했더니 원장이 자기 것만 신경 쓰라며 실내화만 사오라고 한다.

정말 화가 났지만 참는김에 또 참는다.


같은 학원생들이 옆자리에 있지 못하도록 실기시험 번호표를 뽑아서 자리를 정한단다.

내가 뽑은 숫자는 3번, 사주학의 구궁수로 볼 때 매우 좋은 숫자이다.

일진도 좋고 숫자도 잘 뽑았으니 왠지 기분이 좋아진다.


시험관의 주의사항이 끝나고 시험이 시작되었다.

얼굴의 T존, U존, 목부위 들이 다행스럽게 모두 건성피부로 정해졌다.

건성피부에 대한 관리계획표를 작성한다.

딥클렌징은 AHA로, 팩은 석고마스크로 정해졌다.

이제 순서에 맞춰 작업을 하면 된다.


딥클렌징을 하려고 모델의 눈을 솜으로 가리다가 옆사람을 힐끗 보니 아이립크림으로 눈과 입술을 바른다.

아차, 저게 먼저였지... 가리던 솜을 다시 한쪽에 놓고 아이립크림을 발랐다.


석고마스크를 하기 전에 석고베이스크림을 먼저 바르는데, 생각이 나지 않아서 스파츌라에 덜어 손으로 바르면서 옆사람을 보니 용기에 덜어서 붓으로 바른다.

맞아, 이게 아니었지.. 손을 닦고 얼른 용기에 덜어 붓으로 발랐다.

팔 다리 관리에서는 어김없이 허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한손 팔꿈치를 침대에 올려 놓으니 조금 괜찮아져서 그자세로 팔다리 관리를 적절하게 끝냈다.


다리털 제모시에는 손에 꽉 끼는 고무장갑을 끼고 하는데, 고무장갑을 끼는 순간 장갑이 찢어졌다.

어떻게 고무가 찢어지지? 생각을 하면서 다른쪽을 끼는데, 이것 마저 찢어진다.

모두들 장갑끼고 하는데, 나혼자 맨손으로 했다.

하지만 제모는 생각보다 잘 되었다.


시험이 끝났다.

비닐 지퍼팩, 여러번의 실수...

다음번 시험에 접수를 해달라고 할까..개인적으로 접수를 하고 싶지만 모델 화장이 문제고..

아뭏든 발표는 다음주 목요일이었다.


다섯명의 감독관들이 돌아다니면서 지켜봤는데..

혹시라도 내가 실수하는 장면에서 모든 감독관들이 다른곳을 주시하였다면..

나를 못봤다면.. 하는 일말의 기대를 해본다.

예전에는 궁금한게 있으면 꿈이라도 꿨는데, 꿈도 안꿔진다.


발표날인 목요일이 되었다.

오전 9시가 되면 인터넷으로 확인할 수 있다.

확인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중에 학원생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선생님 축하드려요~ 합격하셨대요,`

엥? 정말?

컴퓨터를 켜고 사이트에 접속하여 확인해보니 65점/합격이란다.

일진이 좋고, 번호표가 좋았으니 실수했을때 정말로 감독관이 못봤나보다.


원장에게 전화를 할까 말까 하다가 했다.

축하한다는 원장의 말에 감사하다고 말하고, 학원생들에게 내일 점심을 쏘겠다고 말했더니 다른 합격자들이 오늘 온다고 했다고

나에게도 시간되면 오늘 오라고 한다.


학원에 갔더니 보는이들마다 축하를 해준다.

제일 불량한 학생이 합격했다면서 놀랍단다.

7명의 수험생들 중에서 3명이 합격했다고 한다.

원장도 깜짝 놀랐다고 한다.

원장의 말이 바뀌었다.

ㅇㅇ씨에서 ㅇㅇ님으로..

원장이 묻는다.

"어떻게 합격했어요?"

내가 말했다.

"머리가 허여니까 노인넨줄 알고 경로우대 법칙으로 합격시켜준것 같아요."


그동안의 푸대접(?)을 합격이라는 단어로 복수했다. ㅎㅎ

 

 

 



이 내용은 2015년 10월 22일 <여성시대> 중 목요일의 코너 <남성시대> 1부 마지막 사연으로 소개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