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한국전쟁)
6·25 전쟁 우리 민족이 서로 싸운 슬픈 전쟁
남북간의 적대감은 갈수록 커졌어
일제로부터 해방되었다고 기뻐한 것도 잠시, 38 도선을 경계로 한 민족에 두 개의 국가가 세워지면서 이제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지. 남북은 서로 경쟁하며, 같은 민족이라기보다는 적으로 생각하게 되었어. 북한은 남한을 미국이 친일파를 내세워 다스리는 식민지라며 적대시했어. 남한에서도 ‘북진 통일’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북한을 적대시했지.

소련과 중국이 북한의 남침을 도와주기로 약속했어
1949년 3월, 김일성과 박헌영 등 북한의 핵심 인물들이 평양을 떠나 소련을 방문하여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의 지도자들과 만났어. 이때 소련은 북한이 남한을 공격하는 것에 동의하고, 긴밀한 협력을 약속했지. 김일성은 이어서 중국 공산당의 마오 쩌둥과 만나 남침에 대한 동의를 얻어냈어. 중국은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조선인 부대를 귀국시키고 보급품을 공급하겠다고 약속했지. 1948년 12월, 소련은 북한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고 미국에게도 남한에서 군대를 철수시킬 것을 강력히 요구했어. 1949년 6월, 미군이 철수하자 북한의 전쟁 준비는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지.


1. 북한군의 진격 (1950.6.25.)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은 38 도선 전 지역에서 총공격을 시작했어. 그 전에도 38도선 부근에서 종종 크고작은 군사 충돌이 있었기 때문에 서울 시민들은 ‘38 도선에서 또 전투가 벌어졌나 보구나.’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지. 그 사이 북한군은 서울을 향해 밀고 내려왔어. 전투가 시작된 지 사흘 만에 서울이 북한군에게 점령되었어.
2. 유엔군의 참전 (1950.7.17.)
마음이 다급해진 이승만은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어. 미국은 빠르게 남한에 군대를 보냈고, 유엔을 움직여 유엔군도 보냈지. 미군이 개입했지만 남한군과 미군은 낙동강까지 밀렸지. 그러다 9월 15일 새벽, 미군이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하면서 9월 28일에는 서울을 되찾을 수 있었어. 서울에 돌아온 이승만 정권은 내친 김에 북진 통일을 이루려고 했어. 1950년 10월 1일 북진을 시작한 남한군과 유엔군은 10월 20일 평양을 점령하고, 10월 26일 압록강에 이르렀지.
3. 중공군의 개입 (1950.10.25.)
압록강까지 밀린 북한군이 중국에 도움을 요청하자, 중국은 18만 명의 중국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었어. 중국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다시 역전되었지. 12월 10일 평양이 다시 중국군의 손에 들어갔고, 1951년 1월에는 서울이 다시 북한군의 손에 들어갔어. 그러나 남한군과 미군은 우월한 무기를 앞세워 다시 북한군을 몰아붙였고, 3월 5일에 서울을 되찾았어.
4. 38 도선을 중심으로 한 치열한 전투 (1951.3 ~ 53.7.27)
1951년 3월, 38 도선을 중심으로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어. 전쟁 1년 만에 전선은 다시 최초의 출발점으로 돌아온 거야. 남북한은 물론 미군이나 중국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휴전의 필요성을 느꼈지. 2년 동안 계속 휴전 회담이 이뤄지고 있는 동안에도 산봉우리 하나라도 더 차지하기 위한 전쟁은 계속되었어. 그 전의 전투에 비해 이 시기의 전투가 가장 치열해서 사망자도 많았지. 결국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맺어졌고, 맞서 싸우던 전선은 휴전선이 되었어.

일제로부터 해방되었다고 기뻐한 것도 잠시, 38 도선을 경계로 한 민족에 두 개의 국가가 세워지면서 이제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지. 남북은 서로 경쟁하며, 같은 민족이라기보다는 적으로 생각하게 되었어. 북한은 남한을 미국이 친일파를 내세워 다스리는 식민지라며 적대시했어. 남한에서도 ‘북진 통일’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북한을 적대시했지.
1949년 3월, 김일성과 박헌영 등 북한의 핵심 인물들이 평양을 떠나 소련을 방문하여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의 지도자들과 만났어. 이때 소련은 북한이 남한을 공격하는 것에 동의하고, 긴밀한 협력을 약속했지. 김일성은 이어서 중국 공산당의 마오 쩌둥과 만나 남침에 대한 동의를 얻어냈어. 중국은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조선인 부대를 귀국시키고 보급품을 공급하겠다고 약속했지. 1948년 12월, 소련은 북한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고 미국에게도 남한에서 군대를 철수시킬 것을 강력히 요구했어. 1949년 6월, 미군이 철수하자 북한의 전쟁 준비는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은 38 도선 전 지역에서 총공격을 시작했어. 그 전에도 38도선 부근에서 종종 크고작은 군사 충돌이 있었기 때문에 서울 시민들은 ‘38 도선에서 또 전투가 벌어졌나 보구나.’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지. 그 사이 북한군은 서울을 향해 밀고 내려왔어. 전투가 시작된 지 사흘 만에 서울이 북한군에게 점령되었어.
마음이 다급해진 이승만은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어. 미국은 빠르게 남한에 군대를 보냈고, 유엔을 움직여 유엔군도 보냈지. 미군이 개입했지만 남한군과 미군은 낙동강까지 밀렸지. 그러다 9월 15일 새벽, 미군이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하면서 9월 28일에는 서울을 되찾을 수 있었어. 서울에 돌아온 이승만 정권은 내친 김에 북진 통일을 이루려고 했어. 1950년 10월 1일 북진을 시작한 남한군과 유엔군은 10월 20일 평양을 점령하고, 10월 26일 압록강에 이르렀지.
압록강까지 밀린 북한군이 중국에 도움을 요청하자, 중국은 18만 명의 중국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었어. 중국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다시 역전되었지. 12월 10일 평양이 다시 중국군의 손에 들어갔고, 1951년 1월에는 서울이 다시 북한군의 손에 들어갔어. 그러나 남한군과 미군은 우월한 무기를 앞세워 다시 북한군을 몰아붙였고, 3월 5일에 서울을 되찾았어.
1951년 3월, 38 도선을 중심으로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어. 전쟁 1년 만에 전선은 다시 최초의 출발점으로 돌아온 거야. 남북한은 물론 미군이나 중국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휴전의 필요성을 느꼈지. 2년 동안 계속 휴전 회담이 이뤄지고 있는 동안에도 산봉우리 하나라도 더 차지하기 위한 전쟁은 계속되었어. 그 전의 전투에 비해 이 시기의 전투가 가장 치열해서 사망자도 많았지. 결국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맺어졌고, 맞서 싸우던 전선은 휴전선이 되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