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장

의자왕은 정말 삼천 궁녀를 거느렸을까?

전통활법 2012. 1. 7. 09:26

만주 부여에서 출발하여 한강에 뿌리내리고 국가의 터전을 잡았던 백제는 700여년 동안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강성한 나라였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백제의 오랜 역사보다는 마지막 왕인 의자왕과 삼천궁녀를 먼저 떠올린다.

의자왕은 백제의 제 31대 왕(제위 641~660년)으로 무왕의 맏아들로 태어나 632년(무왕 33년) 태자로 책봉되었다.

 

백제가 멸망하던 날 당군을 피해 3천 명의 궁녀가 낙화암 아래 백마강으로 꽃잎처럼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정말 3천 궁녀였을까?

주서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백제 수도 사비의 가구 수는 1만 호라고 한다.

호구당 5명씩 살았다고 가정할 때, 당시의 사비성의 면적과 인구 수등 자료를 분석해 보면 사비성에 3천 궁녀가 있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한다.

유적을 통해 당시 궁궐의 규모를 파악해 봐도, 3천 궁녀가 지낼만한 공간도 없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에도 삼천 궁녀에 관한 기록은 없다고 한다.

다만 <삼국유사>에 부여 북쪽에 큰 바위가 있는데, 궁인들이 떨어져 죽었다는 낙화암의 전설이 있을 뿐이다.

 

삼천궁녀는 어디에서 부터 시작된 말일까?

조선 초기의 왕들은 나라를 통치하기 위하여 멸망한 나라의 마지막 왕들에 대해 방탕과 음란이 나라를 망하게 했다고 해석했다.

이때 의자왕의 궁녀 숫자도 많이 부풀리긴 했지만, 3천 이라는 숫자는 언급되지 않았다.

 

3천이라는 숫자가 역사상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조선 명종때 학자 민재인이 <백마강부(白馬江賦)>에서 의자왕의 방탕한 생활을 말하며"삼천 즉, 구름처럼 많다. (三千其如雲)" 는 표현을 쓴 것이 시초가 되었다.

그러니 3천이라는 숫자는 숫자로서의 개념보다 문학적 상징어로 보는게 맞는 것이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3천 궁녀가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게 된 계기는 바로 대중가요 였다.

일제시대부터 1960년대 까지는 `의자왕`에 대한 노랫말이 많았는데, 이는 패망한 나라에 대한 안타까움이 당시 사람들의 마음에 절절히 와 닿았기 때문일 것이다.

당대를 대표하는 가수들은 누구나 3천 궁녀를 소재로 노래를 불렀을 정도라고 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3천 궁녀의 전설은 우리 귀에 익숙해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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